[인터풋볼]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세계적인 축구 스타들도 마찬가지. 현재는 가장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스타지만 모두가 꽃길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고, 시련을 이겨내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축구 전문 언론 '인터풋볼'이 준비했다. 꼭지명은 역사를 영어로 한 'HIS-tory'. 즉 그 사람(His)의 이야기(Story)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몰랐던 슈퍼스타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들에게 소개한다. [편집자주]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UAE 아시안컵 8강전에서 카타르에 0-1로 패했다. 이로써 한국은 4강 진출에 실패하며, 59년만의 우승 도전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쉬움이 남는 결과였다. 그리고 한 시대가 저물었다.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신화의 주역 기성용과 구자철이 아시안컵 이후 정든 태극마크를 반납하며 사실상 ‘2012년 황금 세대’가 막을 내렸다. 기성용과 구자철은 박지성과 이영표가 은퇴한 뒤 한국 대표팀의 중심을 잡아주며 약 10년의 시간을 함께 했고, 지난 아시안컵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동반 은퇴를 발표했다.

기성용과 구자철은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2019 아시안컵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며 많은 비판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두 선수가 한국 축구에 남긴, 한국 축구를 위해 헌신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두 선수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이번 ‘정지훈의 HIS-tory'에서는 한국 축구의 ’두‘ 캡틴 기성용과 구자철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1편은 ’헌신의 아이콘‘ 구자철이다.

# 구자철의 등장: K리그를 평정한 만능 미드필더, 대표팀에 발탁되다

구자철은 2007년 보인고등학교를 졸업 후 드래프트 3순위로 제주 유나이티드에 입단했고, 그해 4월 인천과의 리그컵 경기에서 프로 데뷔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제주의 핵심 미드필더로 성장한 구자철은 2010년 제주의 돌풍과 함께 K리그 최고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특히 2010시즌 5골 12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 도움왕에 올랐고, 제주의 준우승을 이끌며 K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라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구자철은 2010 K리그 시상식에서 판타스틱 플레이어, 베스트 11, 도움왕을 수상하며 K리그를 평정했다.

이미 구자철은 한국 축구의 미래였다. 구자철은 한국 U-18, U-20 대표팀 등에서 활약하며 한국 축구의 미래라는 평가를 받았고, 2009년 수원컵 국제청소년축구대회에서는 한국 대표팀의 주장을 맡으며 이미 리더십까지 인정받았다. 또한, 2009년 이집트 U-20 월드컵에서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홍명보호의 8강 진출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맹활약했고, 3골 1도움을 기록하며 박주영 등과 함께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국가대표 발탁은 자연스러웠다. 이미 청소년 대표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구자철은 2008년 2월 17일 동아시아컵 중국과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이는 역대 최연소 A매치 데뷔 순위 8위였다. 이후 K리그를 평정하며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 자리 잡은 구자철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5개월 앞둔 2010년 1월, 당시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었던 허정무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겨울 전지훈련에 소집됐고, 1월 9일 잠비아와의 경기에서는 득점포까지 가동했다. 비록 월드컵 최종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구자철은 등장은 화려했고, 한국 축구의 간판 미드필더가 등장했음을 알렸다.

# 구자철의 비상: 아시안컵 득점왕 그리고 올림픽 ‘동메달 신화’

구자철이 본격적으로 한국 축구의 핵심으로 떠오른 대회는 2011년 아시안컵이다. 남아공 월드컵이 끝난 후 조광해 감독이 대표팀이 지휘봉을 잡으며 본격적인 세대교체가 진행됐고, 구자철을 비롯한 젊은 선수들이 대거 발탁됐다. 구자철은 이 대회에서 남아공 월드컵 탈락의 한을 씻으며 맹활약했고, 공격형 미드필더와 처진 스트라이커를 오가며 5골 3도움을 기록했다. 결국 구자철은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고, 박지성, 이영표 은퇴 이후 새로운 세대가 싹트고 있음을 보여줬다.

아시안컵 맹활약으로 독일 분데스리가 볼프스부르크에 입단한 구자철은 2012 런던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주장 완장을 차며 엄청난 기대를 받았다. 박주영이 와일드카드로 발탁된 가운데 구자철, 기성용 등이 있는 홍명보호는 좋은 전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고, 특히 구자철은 엄청난 활동량을 바탕으로 그라운드 곳곳을 누볐다.

구자철의 활약은 최고였다. 조별리그, 8강, 4강까지 강철 체력을 과시했고,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볼 배급, 공격 침투, 슈팅력, 패싱력, 전방 압박 등 자신의 장점을 완벽하게 발휘했다. 무엇보다 일본과의 3,4위전에서는 쐐기포까지 터뜨리며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고, 주심에게 ‘WHY?'를 강하게 외치는 장면에서 완벽한 주장이라는 것도 보여줬다. 결국 구자철이 이끄는 홍명보호는 ’숙명의 라이벌‘ 일본을 제압하고 동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축구의 역사를 새로 썼다.

# 구자철의 전성기: 전성기에 맞이한 2014 월드컵과 2015 아시안컵

보통 축구 선수의 전성기를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자철의 전성기는 2014 브라질 월드컵 대회였다. 이미 대표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자리 잡은 구자철은 공격형 미드필더, 좌우 측면, 처진 공격수, 펄스 나인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며 만능 미드필더 역할을 했고, 이때부터 헌신의 아이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독이 됐다. 구자철은 최강희 감독과 홍명보 감독을 거치면서 꾸준하게 대표팀에서 득점포를 가동하며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약했지만 정작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대표팀의 주장을 맡으며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결과는 1무 2패로 아쉽게 탈락했다. 구자철 역시 조별리그 3경기에 모두 출전해 왕성한 활동량과 함께 득점까지 기록했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특히 구자철 특유의 색깔이 없어졌다는 평가를 이때부터 들었고, 결과적으로는 너무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약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실패를 맛본 대표팀은 울리 슈틸리케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며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고, ‘에이스’ 손흥민을 중심으로 팀을 꾸렸다. 그러나 대표팀 중원의 핵심은 여전히 구자철이었다. 슈틸리케 체제로 첫 메이저 대회인 2015년 호주 아시안컵에 나섰고, 당연히 구자철도 대표팀에 발탁되며 오만과 조별리그 1차전에서 1-0 승리를 이끌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문제는 부상이었다. 이미 이청용이 부상으로 낙마한 가운데 구자철도 부상으로 대회를 조기에 마감했고, 이후부터 구자철은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대표팀에서 확실한 임팩트를 남기지 못했다. 물론 2016년 9월 1일 중국과의 월드컵 예선에서 A매치 17번째 득점에 성공하며 3-2 승리를 이끌기도 했지만 전성기에 찾아온 부상은 아쉬움이 남았다. 특히 구자철은 유럽과 국내를 오가면서 무릎 등에 문제가 생겼고, 조금씩 구자철의 장점이 사라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 구자철의 은퇴: 아쉬움이 남았던 2018 월드컵 그리고 마지막 메이저 대회

이제 막 서른. 축구 선수로 봤을 때는 여전히 전성기였다. 그러나 구자철은 2018 러시아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이미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고, 어쩌면 마지막 메이저 대회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특히 구자철의 무릎은 더 이상 대표팀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칠 수 없는 상태였고, 그럼에도 월드컵에서 베테랑의 투혼을 다짐하며 비장하게 대회에 나섰다.

하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신태용 감독은 스웨덴전을 앞두고 ‘트릭’을 예고했고, 결국 김신욱과 구자철의 깜짝 카드를 사용했지만 결과는 아쉬운 패배였다. 구자철은 이 경기에서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공수 모두에 기여했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아쉬운 패배와 함께 구자철은 장점이 사라졌다는 조금은 가혹한 평가를 받아야 했다.

구자철은 스웨덴전 혹평을 뒤로하고 독일과의 3차전을 준비했다. 신태용 감독은 3차전에서 손흥민과 함께 구자철을 선발 출전시키는 승부수를 던졌고, 구자철은 후반에 부상으로 교체될 때까지 뛰고 또 뛰며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했다. 당시 구자철의 활동량은 압도적이었고, 현장에서 지켜본 한 독일 기자는 구자철의 활동량을 보고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비록 TV 화면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본 모든 사람들은 구자철의 헌신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역사적인 승리에 밑거름이 됐다. 특히 구자철의 전방 압박과 헌신적인 수비 가담은 환상적이었고, 최강이라 자부하는 독일과 중원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결과를 만들었다.

잦은 부상과 축구 팬들의 비난. 구자철은 2018 러시아 월드컵 이후 은퇴를 고심했다. 그러나 대표팀에 부임한 파울루 벤투 감독은 구자철을 직접 설득했고, 2019 아시안컵까지 뛰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구자철은 마지막 메이저대회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참가를 결정했고, 베테랑의 마지막 헌신을 약속했다.

그러나 결과는 허망했다. 구자철은 조별리그 1,2차전에 모두 선발 출전해 무난한 활약을 펼쳤지만 국내에서는 부진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여기에 작은 부상이 겹치면서 바레인과 16강전에는 출전하지 못했고, 카타르와 8강전에서도 후반 28분에 교체 투입됐지만 팀의 충격적인 패배를 막지 못했다. 그리고 구자철은 대표팀 은퇴를 공식 선언했고,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채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 구자철의 작별사: 끝까지 한국 축구의 발전을 생각했던 구자철

구자철은 끝까지 한국 축구를 위해 헌신했다. 무릎 통증에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고,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면서도 끝까지 한국 축구의 발전만 생각했다.

구자철은 카타르와 8강전을 마친 뒤 믹스트존에서 “주사기로 무릎의 물을 뺀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호주에 다녀오고 나서 주사기로 무릎의 물을 뺐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대표팀에서 경기를 뛰는 것을 즐기지 못하고 압박감을 느끼게 되더라”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그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스스로 놓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며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오랜 기간 대표팀에 몸담고 있던 구자철은 그간 느낀 것이 많아 보였다. “언제부턴가 대표팀에서 뛰는 것을 즐기지 못했다”고 고백했던 구자철은 이번 아시안컵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에도 씁쓸함을 표했다.

“모든 성공과 실패에는 과정이 뒤따른다”던 구자철은 “목표를 정하고, 이를 이루기 전까지는 과정이란 것을 거쳐야한다. 그 과정에서 실패와 실수가 나타나기도 한다. 선수들이 한국축구를 위해 힘을 모으려면 실망보다는 앞으로의 목표를 이루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도를 했는데도 안될 경우, 그것마저도 과정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협회에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벤투 감독님과 코칭스태프를 데려왔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여준 결과들과 앞으로 보여줄 결과들을 일단은 믿고 지켜봐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기다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제는 변해야 할 때”라며 과정을 지켜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축구의 ‘레전드’ 차범근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차범근은 과거 “한국은 실패가 경험이 되지 않는다. 실패가 실패에서 멈춘다. 아픈 경험도 성과의 발판으로 삼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쓴소리를 던진 바 있다.

구자철이 대표팀을 떠나며 남긴 말과 일맥상통하다. 믹스트존에서 동료 선수들은 물론이며, 취재진 다수도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9분 가까이 차분하게 열변을 토했던 구자철. 구자철이 대표팀을 떠나며 남긴 한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글=정지훈 기자

사진=게티이미지, 대한축구협회, 윤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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